■ 제3의 장소

레이 올든버그 /풀빛

[베리타스알파=김경 기자] 책 ‘제3의 장소’는 삶의 질을 높여줄 책이다. 환경이 안 받쳐줘도 그만한 욕구의 실체를 알고 환경을 만들어갈 기제를 주기 때문이다. 당장 찾아보자. 미국이 아닌 한국 정도면, 가정과 일터의 지친 삶은 내려놓고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하며 유쾌한 농담과 진지한 토론을 펼칠 장소가 집 앞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제1의 장소는 집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의 본질이 있는 곳이다. 한국인에게 맞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제2의 장소는 일터다. 집 다음으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곳이며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는 중요한 곳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제3의 장소는 집도 직장도 아닌, ‘비공식적 공공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가정이나 일터에서 주어지는 사회적 역할만으로 본연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필수적인 공간이다.

저자는 삶의 중요한 요소이면서도 이용자는 거의 의식하지는 못했던 ‘장소’의 사회적 가치를 발굴해낸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공동체 상실이나 고독감 같은 문제들의 원인이 제3의 장소의 쇠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린다. 거주민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도시계획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고찰하면서, 바로 이 지점에서 제3의 장소를 복원하고 공동체를 되살릴 희망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제3의 장소가 어떤 효과를 내는지 독일의 비어슈투베, 프랑스의 카페, 영국의 펍, 아라비아반도의 커피하우스 등 긍정적인 사례도 제시한다.

책은 1989년 초판이 출간되자마자 같은 해 ‘뉴욕 타임스 북 리뷰’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될 만큼 주목을 받았다. 이후 사회학자 기업가 도시계획가는 물론 도시거주민에게 영감을 주었고, 도시사회학의 중요한 저작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책은 1999년 개정판이다. 미국인이 문제제기한 만큼 미국사회에 맞춰져 있지만, 우리의 상황도 투영된다. 책이 묘사하는 상황은 현재 한국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일치한다. 획일화 대형화를 추구하는 도시계획 및 건축, 공공시설 축소, 공동체 상실… 대형 프랜차이즈의 성업으로 작은 가게들이 맥없이 사라지는 현상 등을 겪으며, 우리사회도 많은 부작용을 겪는 중이다. 새로이 나타난 장소들은 신속한 서비스를 강조하다 보니 느긋한 휴식과 거리가 멀어졌다. 나이 든 세대와 어린 세대가 어울릴만한 곳이 없고, 계층간 갈등은 심해졌으며, 공동체라 할만한 것을 찾기 힘들다. 가정과 일터라는 두 디딤대만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한국은 미국과 사정이 다르다. 미국보다는 덜 개인적이다. 동네 사랑방에서, 방앗간에서 서로의 노고를 다독이는 문화가 오래였던 나라다. 미국보다는 좁아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차를 끌고 광활한 대지를 대여섯 시간 달려나가야 하는 나라는 아니다. 게다가 국민 열정이 남다른 덕인지 ‘핫 플레이스’라 불리는 한국형 제3의 장소는 많다. 유행을 타고 동네가 바뀌지만 (핫 플레이스로 뜨고 난 다음 치솟는 임대료 탓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삶의 질과 소통 재미를 고려한 제3의 장소가 SNS의 어마무시한 정보흐름을 타며 뜨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잘 찾아보자.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도시와 도읍면 차원에도 프로정신을 발휘한 제3의 장소가 많다. 녹지 않는 통얼음을 잔 하나에 넣기 위해 타 지역으로부터 얼음 공수를 마다 않는 위스키 바, 음향시설에 무게를 두고 재즈공연도 겸하는 호수 앞 이탈리안 레스토랑, 천연발효 빵을 만들기 위해 오후 서너 시간만 문을 여는 숲속 한 가운데 작은 빵집 등…

물론 한국형 제3의 장소가 같은 공간에서 만난 타인들이 서로 격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그 장소가 집 근처 일터 근처여서 그저 발걸음 따라 가면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데까지 시간은 걸릴 테다. 감성은 폭발하지만 SNS에 갇혀 무표정한 얼굴로 스마일 이모티콘을 남발하는 수줍음에서 벗어나 마음을 열어 현실을 사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테다. 그래도 책을 통해 공간과 대면의 효과를 안다면, 그것만으로 시작은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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