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복의 미술관노트] 어둠을 뚫는 불굴의 의지

-귀스타브 모로 ‘프로메테우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인 이아페토스의 아들이다. 신화에 따르면 그가 신의 형상에 따라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공모하여 태양의 전차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화가 난 제우스는 인간과 프로메테우스를 벌주기 위해 아름다운 판도라를 지상으로 보냈고, 판도라의 상자에서 온갖 불운이 나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붙잡혀서,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이 쪼이고 밤이면 다시 간이 자라나 끝나지 않는 고통을 겪었다. 많은 화가들이 이 주제를 다루었지만 19세기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가 그린 그림이 단연 돋보인다.

절벽 끝에 팔 다리가 묶인 채로 프로메테우스가 앉아 있다. 왼편에는 밝은 색의 큰 맹금이 피묻은 부리로 그의 살을 삼키는 중이다. 신의 머리 위에는 작은 불꽃이 그려져 있다.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주었다는 표시다. 오른쪽에는 험준한 바위산이 펼쳐져 있어 벗어날 길 없는 극한의 운명을 짐작케 한다. 보라색과 짙은 회색의 하늘도 암울하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의 얼굴과 어깨 주변의 하늘은 밝고 푸르다. 그의 몸 역시 왼쪽과 앞에서 오는 빛으로 환하다. 무엇보다 살(간의 위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래쪽이다)이 쪼이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온 몸을 꼿꼿이 세우고 먼 곳을 응시하는 태도에서 확고한 신념이 느껴진다. 인상적인 것은 깊고 깊은 산중에 있는 이오니아식 기둥에 그가 묶여있다는 점이다. 인류의 문명이 그에게 빚진 결과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기둥과 기둥 뒤쪽의 짙은 푸른색은 형벌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이 없는 프로메테우스의 불굴의 의지를 나타내는 듯하다.

모로보다 250여년 전(1611-12), 루벤스는 거꾸로 사슬에 묶인 채 간이 뜯기는 아픔을 견디는 모습으로 프로메테우스를 그렸다. 독수리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얼굴과 아랫배를 짓누르면서 양날개를 활짝 펼친 채 금방이라도 신의 몸을 덮칠 기세다. 루벤스보다 50여년 뒤, 조르다노가 그린 그림(1660)에서 독수리는 마치 악령처럼 잘 보이지 않는 채로 무자비하게 신의 몸을 탐한다. 사지를 벌리며 고통스러워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은 고대 그리스 조각 ‘라오콘’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다른 화가들이 형벌을 겪는 신의 고통에 주목한다면, 모로는 인류를 위해 투쟁한 혁명가이자 투사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킨다.

눈여겨 보면 모로가 그린 새는 루벤스와 조르다노 그림에서의 독수리와 다르다. 모로는 신들 중의 신인 제우스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이런 비열한 행위를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같은 수리과(科)이지만 죽은 동물만 먹는 종으로, 머리에서 목까지 털이 없고 색깔도 짙지 않게 그렸다. 사납고 용맹스럽기보다는 신의 기개에 주눅들어 보이는 모습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의 안색을 살피는 듯도 하다. 프로메테우스는 왼발로 수리의 깃털을 밟고 있는데, 아래에 이미 죽은 또다른 수리가 널부러져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몸 뒤쪽에 펼쳐진 수리의 날개는 마치 승리한 신의 날개처럼 보인다. 머리 위의 불, 뒤로 넘겨진 긴 머리, 수염, 결연한 표정에서 중세기에 많이 그려졌던 승리의 도상(圖像)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리스 신화와 불교, 기독교와 동방 신화를 자유자재로 섞어서 종합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모로에게는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귀스타브 모로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생활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복했기 때문에 당대 미술계와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에 충실할 수 있었다. 1852년 처음 살롱에 출전한 이래로 1880년까지 꾸준히 참가했다. 1857년에서 1859년 사이에는 로마,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 등을 여행하면서 티치아노,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모작하며 고대와 르네상스 회화로부터 깊은 감화와 가르침을 받는다. 페르시아와 인도풍의 장식, 불교적인 모티브로 현란하게 캔버스를 채우며 그리스 로마 신화와 기독교적인 주제를 주로 다루었다.

모로는 사후에 자신의 작품이 사라지거나 흩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살던 집을 미술관으로 개조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1896년에 완공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평생에 걸친 자신의 예술적 여정이 그대로 보존된다는 전제 하에 집과 소장품 전체를 국가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작성한다. 1903년, 화가가 세상을 뜬지 5년 후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아담한 규모의 미술관은 4개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족들의 거주 공간이었던 2층을 지나 3층에 올라가는 순간, 환상과 꿈, 죽음, 치명적인 유혹, 번뇌, 고통, 승리의 기쁨이 우아하면서 현란하게 펼쳐진 캔버스들을 마주하게 된다. 층고가 높아 큰 그림을 감상하기에 이상적이다. 1841년 어머니와의 첫 이탈리아 여행의 결실인 데생집을 포함한 많은 데생들과 유화 연습작품, 수채화, 파스텔화들도 볼 수 있다. 특히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은 파리의 저택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계단으로 손꼽힌다.

/정연복 편집위원 www.facebook.com/yeonbok.jeong.75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 ‘프로메테우스 Prométhée’(1868, 캔버스에 유채, 205X122cm,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파리)

선명한 화질의 그림으로 바로 가기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0/Prometheus_by_Gustave_Moreau.jpg

 

 
본 기사는 교육신문 베리타스알파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일부 게재 시 출처를 밝히거나 링크를 달아주시고 사진 도표 기사전문 게재 시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저작권자 © 베리타스알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