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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복의 미술관노트] 내 이름은 마들렌

기사승인 2019.06.03  08: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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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기유민 브누아 ‘마들렌의 초상화’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서 노예들이 해방된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프랑스에도 노예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프랑스 노예상인들은 카리브해 식민지역의 주요 농산물이었던 사탕수수와 커피 생산을 위해 17세기 말부터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실어 날랐다. 18세기 프랑스 경제는 이들의 희생없이는 불가능했다. 1789년 혁명이 일어나자 노예들도 반란을 일으키며 해방을 요구했으나 혁명가들이 주장했던 ‘자유와 평등’은 흑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국가의 이익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노예제도 폐지는 영국과의 전쟁 때 흑인병력의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식민지에서 얼떨결에 실행되었고, 1794년 국민공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언된다. 공식적 폐지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의 상황은 여전히 참혹했던 시대에 자크-루이 다비드의 제자였던 여류 화가 마리 기유민 브누아(Marie-Guillemine Benoist, 1768-1826)가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렸다. 모델은 과들루프 출신의 마들렌 Madeleine이다. 그림은 1818년에 국가가 구입하여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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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걸이를 한 흑인여인이 앉아 있다. 왼팔로 상의를 잡고 오른팔은 자연스럽게 허벅지에 둔 채 4분의 3 각도로 얼굴을 돌려 관람객을 바라본다. 의자를 덮은 푸른 천, 머리에 두른 터번과 옷의 하얀색이 검은 피부를 더욱 부각시킨다. 옷을 여민 붉은 끈이 눈길을 끈다. 배경 역시 밝은 색으로 단순하다. 한쪽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어 대담해 보이지만, 피에로 디 코지모(Piero di Cosimo)의 ‘시모네타 베스푸치의 초상화’(1490)나 라파엘로의 ‘라 포르나리나’(1518-19)를 떠올리면 새로운 것도 아니다. 예술사학자 피에르 로젠베르그(Pierre Rosenberg)는 그림의 모델을 ‘검은 포르나리나’라고 명명한다. 마들렌은 해방된 노예로, 브누아 집안에서 일하는 하녀였다. 당당하고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노예였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검은 피부를 그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담한 시도였다.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었고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브누아는 아무도 표현하려고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검은 피부를 가진 여인의 아름다움을 미술사 최초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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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한계는 제목에서 드러난다. 흑인을 비하하는 단어였던 ‘네그르 여인 une négresse’의 초상화라고 한 것이다. 이보다 2년 전인 1798년 살롱에 지로데가 장-바티스트 벨리(Jean-Baptiste Belly, 1746-1805)를 모델로 그린 그림을 출품하면서 ‘네그로 남성의 초상화 Le portrait d’un nègre’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로데는 유색인을 그린 최초의 초상화를 그려 당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흑인후원회의 반발을 받아들여 제목을 ‘전 식민지 대표, 시민 벨리의 초상화 Le portrait du citoyen Belly, l’ex- représentant des colonies’로 변경한다. 지로데와 달리 브누아는 제목을 바꾸지는 않았다. 작품은 2007년 그랑 팔레에서 개최된 전시회 때 ‘검은 여인의 초상화 Le portrait d’une femme noire’로, 2019년 봄, 오르세에서 개최중인 전시회에서 ‘마들렌의 초상화 Le portrait de Madeleine’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당대에 흔히 쓰이긴 했지만 흑인을 비하하는 말이었던 ‘네그르 여인’에서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찾게 된 것이다.

마들렌과 벨리는 서구 미술사에 등장하는 명문가의 초상화에 충실한 형식으로 그려졌다. 두 사람 다 아직 노예이거나 노예제도의 잔존으로 고통을 겪는 많은 흑인들의 상황과는 무관해 보이는 모습이다. 현실은 끔찍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사르지에 바트만(Saartjie Baartman, 1788/1789-1815)은 엉덩이가 크다는 이유로 광장이나 서커스 등에서 나체로 전시되었다.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 취급당했던 그녀는 사후에는 박제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이는 흑인들에게 자행했던 유럽인들의 무수한 만행 중 하나일 뿐이다. 제3공화국과 제2제정 하에서는 흑인들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이론들이 양산되었고 공교육도 앞장서서 ‘게으르고 둔한’ 흑인의 이미지를 일반인들에게 암암리에 전파하였다. 만국박람회 역시 이국적 전시와 문명국의 대비를 통해 식민문화가 형성되도록 기여했고, 카바레 ‘폴리 베르제르’에서 공연했던 ‘줄루족 춤’과 같은 민속공연 역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877년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파리의 아클리마타시옹(Acclimatation) 동물원에서는 아프리카인들이 전시되는 행사가 수십 차례 개최되기도 했다.

2019년 봄, 파리의 오르세 박물관에서는 ‘흑인 모델-제리코에서 마티스까지’라는 전시회가 개최중이다. 아이티 출신의 조젭(Joseph)을 모델로 난파당한 뗏목의 구조를 요청하는 중심 인물을 그린 제리코, 폭동 혹은 반란이 일어난 풍경을 뒤로 하고 지친 소년 병사의 모습을 남긴 퓌비 드 샤반(Puvis de Chavanne), 도망치다 붙잡혀온 노예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형벌의 현장을 증언한 비야르(François-Auguste Biard)와 같은 화가들의 그림은 꾸준히 식민지 혹은 프랑스 본토에서의 흑인들의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문제 등을 제기했다. 다른 한편, 프랑스 작가 졸라는 마네가 ‘올랭피아’(1863)에서 흑인하녀(‘로르 Laure’가 모델)를 그린 이유는 오로지 ‘검은 터치 touche noire’가 필요해서라고 말했다.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는 15세기 이후 서구 미술에 흑인이 등장한 역사는 꽤 길지만, 지금까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이번 전시를 통해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마들렌과 조젭, 로르가 자신들의 이름을 찾고 당당히 미술사에서 존재를 드러낸다.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200년이 훨씬 넘어서야 이런 전시회가 처음으로 열리다니,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정연복 편집위원 www.facebook.com/yeonbok.jeong.75

 

마리 기유민 브누아(Marie-Guillemine Benoist, 1768-1826), ‘마들렌의 초상화 Le portrait de Madeleine’(1800, 캔버스에 유채, 81X6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선명한 화질의 그림으로 직접 가기

https://fr.wikipedia.org/wiki/Portrait_d%27une_n%C3%A9gresse#/media/File:Marie-Guillemine_Benoist_-_portrait_d%27une_negress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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