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드리안 ‘빅토리 부기우기’

[정연복의 미술관노트] 생의 마지막 불꽃, 빅토리 부기우기

-몬드리안 ‘빅토리 부기우기’

평생 깔끔한 양복차림에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몬드리안은 음악을 좋아하는 댄스광이었다. 늘 고독하게, 그러면서도 탐미적으로 살아가던 화가는 2차 대전으로 어수선한 유럽을 벗어나 1940년 10월 13일 뉴욕에 도착한다. 마천루와 네온사인과 재즈음악으로 활력이 넘쳤던 도시에 단번에 사로잡혔고,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빅토리 부기우기’에는 그때의 에너지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화폭은 특이하게 마름모꼴이다. 덕분에 직각의 선들이 자칫 잃게 할 수 있는 리듬감이 생긴다. 차갑고 엄격하게 고수해오던 스스로의 미학을 거부하고 접착밴드를 삐뚤삐뚤하게 잘게 잘라 붙였다. 마치 뉴욕 밤거리의 빛이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하고 부기우기 음악의 선율이 흥겹게 들려오는 듯도 하다.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은 지평선의 나라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이다. 고요와 평화, 부동의 지평선은 인간의 의지와 노동, 지력의 상징인 물레방아가 이루는 수직선을 말없이 품고 있다. 17세기 황금시대 회화의 유산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그 대지에서 화가는 시골의 전원을 그리며 화가수업을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자연과 인간의 관계, 예술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숙고하게 되면서, 당시 많은 예술가들을 사로잡았던 테오소피(Theosophy)에 빠져들었다. ‘접신론(接神論)’ 혹은 ‘신지학(神知學)’으로 번역되는 테오소피는, 한 마디로 종교나 학문, 인종, 나라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875년 뉴욕에서 엘레나 블라바스키(Elena Blavatsky)에 의해 태동된 이 운동의 영향을 받은 몬드리안은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가 아니라 숨겨져 있는 절대적 진리를 자신의 예술을 통해 표현하려 한다.

현실을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사물을 주변 환경에서 떼어내 그것만 줄기차게 그리는 것이다. 시골농가, 전원풍경, 사과나무, 모래언덕 등을 반복해서 그렸다. 클로드 모네가 빛의 순간적인 변화를 포착하고자 같은 장면을 여러 번 그렸다면, 몬드리안은 영원한 진리, 보편적인 진리를 표현하길 원했다. 작업이 진전될수록 모든 사물은 점점 더 단순화되다가 가로선과 세로선으로 구획되기 시작했다. 수평선과 수직선의 중요성은 블라바스키에 의해 발전된 것이기도 한데, 수평적인 지상의 선과 수직적인 성스러움에 토대를 두고 있다.

때마침 1910년대 초, 접하게 된 입체파와 그 이후 20여년 살게 된 파리의 규격화된 건물들은 그를 결정적으로 추상화의 길로 인도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추상화의 문턱에서 현실로 다시 돌아갔지만 몬드리안은 입체파의 여정을 묵묵히 계속 간다. 같은 네덜란드 화가인 테오 반 되스부르흐(Theo van Doesburg)와 함께 색깔과 선, 면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미술을 주장하면서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라고 명명했다. 원칙은 세가지다. 첫째, 곡선이나 사선없이 수직선과 수평선만 있을 것. 둘째, 오로지 파랑, 빨강, 노랑으로 구성되는 삼원색, 그리고 회색, 검정, 하양만 쓸 것. 셋째, 대칭적이지는 않되 완벽한 균형을 이룰 것. 목표는 어떠한 실제 세계를 암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 것이다.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1917년에는 데 스틸(de Stijl)을 결성함으로써 신조형주의 원리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 건축,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게 된다. 이들이 20세기 미술과 삶에 미친 영향은 우리 주변의 패션, 건축, 실내장식을 한 번 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헤이그 시립현대미술관에서 ‘빅토리 부기우기’를 처음 봤을 때 무척 당혹스러웠다. 몬드리안의 색깔이고 구성이되 거칠고 불안정한 테크닉이 전혀 그답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화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검은 선이 완전히 사라지고 삼원색의 선, 혹은 잘게 나눈 색면만으로 작업했을 뿐 아니라, 색면을 재배치하고 수정하는 것이 용이하도록 접착밴드를 비롯한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새로운 재료들 덕분에 지금까지 몬드리안이 캔버스에서 철저히 없애려 했던 현실의 흔적, 우연의 산물, 개인의 표식들이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평생을 탐구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했던 그가 죽기 두 달 전 이 그림을 그리면서 "이제서야 내가 평생 바라던 구성을 찾았다"라며 탄성을 질렀다 하니, 예술은 끝없는 구도(九道)의 길이 분명하다.

1944년 2월 1일 몬드리안은 폐렴으로 운명을 달리 한다. ‘빅토리 부기우기’는 미완성 상태로 이젤(easel) 위에 놓인 채였다. 뉴욕에서 2년 4개월 남짓 살았던 몬드리안은 총 일곱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네 작품이 미완성이다. 그가 좀 더 살았더라면 완성할 수 있었을까? 현재적 느낌,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삶의 리듬을 캔버스에 고정시킨다는 기획은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펼쳐줄 수도 있었을 새로운 시도들이 때이른 죽음으로 계속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정연복 편집위원 www.facebook.com/yeonbok.jeong.75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 ‘빅토리 부기우기 Victory Boogie Woogie’(1942-44, 캔버스에 유채, 테이프, 종이, 숯, 연필, 127X127cm, 시립현대미술관, 헤이그)

선명한 화질의 그림으로 직접 가기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7/Piet_Mondriaan_Victory_Boogie_Woogie.jpg

왼쪽이 원본, 오른쪽은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의 두 부분을 근접하여 편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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