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의 교수가 여러 학과 학생들에게 두꺼운 전화번호부 책을 몽땅 외우라고 시켰다. 자연과학과 공학계열 학생들이 ‘왜요?’ ‘꼭 외워야 하나요?’ 라고 반발한 반면 의대생들만 ‘언제까지 외우면 되나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암기에 얼마나 능통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외우고 보는 의대 공부의 특성 중 하나를 풍자한 우스갯소리다. 의대 공부가 엄청난 양의 암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찌나 힘들고 부담스러웠던지 졸업 후 십 수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가끔씩 의과대학에서 시험 보고 있는 꿈을 꾼다. 긴 시간과 많은 양의 의대 공부를 무사히 마치려면 효과적인 비법들을 터득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체계적이고 공통적인 비결은 뇌과학적 방법을 활용한 복습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망각의 동물이다. 어떤 정보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신의 축복이라고도 불리는 망각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보고 듣고 느낀 온갖 사소한 일들과 과거의 모든 기억이 방금 전의 일처럼 늘 선명하다면, 머리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이를 두고 심리학자 제임스 윌리엄스는 ‘모든 것을 기억하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큼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자동적으로 잊혀지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공부에서 복습이 갖는 의의는 이런 자연적 망각을 극복하고, 공부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중요한 정보에 대한 기억을 선택적으로 오래 유지하는 데 있다. 인간의 기억과 망각에 대한 뇌과학적 연구는 시간을 절약하면서도 더 효과적인 복습을 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중요한 요점들을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반복 주기
망각을 극복하는 암기의 기본은 반복 학습에서 시작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 연구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어떤 정보를 다시 기억할 때 소요되는 시간의 절약율을 조사한 것이다. 한 번 기억한 정보는 시간이 지나면 망각이 일어나는데, 에빙하우스는 일정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얼마나 빠르게 다시 외울 수 있는가를 수치화했다. 연구에 따르면 20분 후에는 58%, 1일 후에는 34%, 6일 후에는 25%의 절약율을 나타냈다. 하루 이내에 반복하면 처음보다 34% 이상의 암기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뜻이다. 뇌과학적 Spaced Repetition(간격을 둔 반복) 이론과 결합하면 30분 후, 1일 후, 1주일 후, 1달 후가 복습하기 좋은 시점이 된다. 처음 1시간 걸려 공부한 분량도 복습에 필요한 시간은 10분 이내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같은 분량을 2시간 공부하는 것보다 1시간 공부하고 나머지 1시간을 쪼개 여러 차례 반복하는 쪽이 암기에 더 효과적이다. 이런 복습 주기는 외국어 단어를 비롯해 서로 내용 연결이 쉽지 않은 단순 암기에 활용한다. 암기 카드를 날짜 별로 작성하면 주기에 맞추어 복습하기 어렵지 않다.

에빙하우스의 연구를 현실에 적용할 때 주의할 점은 연구와 달리 실제 공부에서는 의미 있는 정보들이 더 많다는 점이다. (에빙하우스의 실험은 무의미한 음절을 암기의 대상으로 사용하였다.) 우리가 하는 공부들은 알파벳의 뜻 없는 나열을 외우거나, 불특정 다수의 전화번호를 몽땅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 체계를 가지고 있고 추론이 가능한 정보들은 무의미한 음절과는 다른 망각 패턴을 보인다. 따라서, 개념이나 원리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연상이 가능한 내용들은 바로 다음 날이 아니라 일주일이 지나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복습하면 된다. 단시간에 반복하는 것보다 다시 기억이 가능한 기간 내에서 간격을 최대한 길게 띄운다. 시간 절약은 물론 기억의 장기 보존에 유리하다.

Mnemonics (기억술)
반복이나 복습의 타이밍보다 암기의 테크닉이 중요한 경우도 있다. 암기법은 기존의 확고하고 떠올리기 쉬운 기억들을 새로운 기억의 도구로 사용한다. 주민번호 앞자리나 전화번호 뒷자리를 응용해 로그인 패스워드로 사용하는 것은 기억을 쉽게 하는 아주 기초적인 암기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해부학은 단시간에 수백 개의 뼈와 근육, 신경, 혈관의 이름 및 구조와 기능을 외워야 한다. 이해보다 나열된 정보를 단순 암기해야 하는 공부에서 연상을 통한 기억술은 매우 효과적이다. 예를 들면 뇌신경 12쌍의 이름을 순서대로 외우기 위해 알파벳 머릿글자로 문장을 만들어 외우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 틈틈이Method of Loci(Memory Palace)나 Mind Map 등의 심화된 기억술을 익혀두면 까다로운 내용을 암기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선택적 복습
효과적인 복습을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새로 배운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복습하는 방식은 시간 낭비다. 처음 공부할 때 복습이 필요한 부분에 형광펜으로 표시하거나 밑줄을 그어 놓는다. 불필요한 부분을 건너뛰기 쉽게 미리 준비해 놓는 것이다. 핵심이 되는 키워드와 개념 위주로 복습한다. 한 시간 수업이라면 3가지 정도의 핵심 키워드와 컨셉을 찾는다. 덜 중요한 부분은 핵심 키워드 옆에 정리해 놓는다. 한번 캐면 덩굴에 줄줄이 달려 나오는 고구마처럼 나중에 핵심을 복습할 때 함께 반복될 수 있도록 연결시켜 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Output
이해와 암기가 정보의 입력이라면, 출력을 통한 복습은 이해를 심화시키고 기억을 장기간 보존하는 데 유리하다. 이해 없이는 암기하기 어려운 주제와 개념을 공부할 때 많이 활용한다. 먼저, 알아야 하는 핵심 개념을 쉬운 말로 적어본다. 다음으로, 개념을 아직 모르는 친구에게 간결하고 명확하게 설명해본다. 막히는 곳이 있거나 어렵다면 다시 개념과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책을 찾아 공부한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의 이름을 딴 ‘Feynman Technique’ 또는 ‘교학상장(敎學相長)'식 복습의 방법이다. 아웃풋을 통해 인출의 과정을 거친 기억은 해마에서 장기기억 저장소인 측두엽으로 옮겨 가기 쉬워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동적인 영화나 재미있는 만화는 한번만 보고도 꽤 오랜 시간 등장 인물과 스토리, 장면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 기억에 매우 중요한 장소인 해마로 정보가 전달될 때 감정을 수반하는 정보는 단일 경로가 아닌 복합 경로로 입력된다. 복합경로를 통한 정보는 해마로의 전달이 쉬워져 기억에 잘 남게 된다. 이런 이유로 호기심과 흥미, 감동이 동반된 기억은 쉽게 망각되지 않는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음표와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의 느낌표. 복습이 거의 필요 없는 천재들의 비결이 여기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의원/한의원 배재원 원장 medi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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