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스케스 ‘시녀들’

[정연복의 미술관노트] 사라진, 혹은 감춰진 진실
-벨라스케스 ‘시녀들’

조세희가 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기억한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계층이 사는 낙원구 행복동은 파라다이스나 안온한 삶과는 얼마나 먼 곳인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이었다.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는 위엄과 권위만 있을 것 같은 펠리세 4세의 초상화에 난쟁이와 개를 함께 그려 넣었다. 말년의 걸작 ‘시녀들’이 바로 그 작품이다. 

왼쪽에는 큰 캔버스의 뒷면이 보이고 화가는 붓과 팔레트를 들고 정면을 바라본다. 가운데에는 금발의 마르가리타 공주가 오른쪽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환하게 서 있다. 양 옆의 두 시녀가 몸을 기울이고 있어 공주는 주인공처럼 더욱 부각된다. 이들 뒤에는 대화하는 두 남녀, 계단을 오르려다 돌아보는 시종관이 있다. 모든 인물들의 동작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뒤편 중앙의 조그만 거울로, 그림의 모델인 펠리페 4세 국왕 부부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친다. 화가는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 대신 ‘그림이 그려지는 공간’을 보여주는 특이한 배치와 구도를 펼쳐준다.  

거울은 캔버스가 담지 못하는 공간까지 화폭에 끌어들이는 탁월한 도구로,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이후, 티치아노에 이어 벨라스케스가 자주 활용했다. 부부는 화가가 바라보고 그리는 대상이면서 거울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관람자처럼 나타나 ‘바라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뒤바뀐다. 이는 공주와 대부분의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그림의 중심인물로 등장하여 관람자의 시선을 받고 있지만 사실은 국왕 부부(관람자)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그림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 모두를 관장하며 그리는 화가인 것처럼 보인다. 지나치게 크게 그려진 캔버스의 뒷면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 표현하는 회화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겠다는 그의 의도가 드러난다. 몸을 뒤로 젖히며 모델 쪽을 바라보는 화가의 태도에 창작자로서의 자부심이 엿보인다. 그림이 완성된 몇 년 뒤에 받은 산티아고 기사 훈장은 덧 그림으로 앞가슴에 추가된 것이 분명하다. 

오른편 앞쪽에는 난쟁이 여인과 소년, 개 한 마리가 있다. 궁정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구경거리인 그들이 여기서는 관람자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어두운 구석에 있어 눈여겨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진갈색의 털로 뒤덮힌 개는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활력도 아무런 호기심도 없이 난쟁이 소년이 지그시 누르는 발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루벤스나 티치아노, 반 다이크 그림에 등장하는 위풍당당하거나 사랑스러운 개들과는 사뭇 다르다. 서양회화에서 개는 ‘충직’ ‘정절’을 의미하여 결혼하는 신혼부부가 등장하는 그림(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혹은 그들에게 주는 선물(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대관식(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치의 대관식’), 심지어 예수가 등장하는 그림(베로네세의 ‘엠마우스의 순례자들’)에도 등장한다. 반면, 개는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모독할 때 비유의 대상이 되는 일이 다반사다. 개가 들어간 욕이 전세계에 얼마나 많은가. ‘시녀들’에서 난쟁이와 개는 한쪽 구석에 내몰린 듯이 그려져 ‘즐거움을 주는 존재인 동시에 멸시’의 대상임을 묵묵히 증언하는 듯하다. 

뛰어난 초상화가인 벨라스케스는 난쟁이들의 단독 초상화도 여러 점 남겼다. 그들은 대부분 광대였지만, ‘엘 프리모의 초상화’(1644, 프라도)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출세한 사람도 있었다. 이 그림에서 화가는 앉은 자세로 난쟁이라는 신체적 결함을 덜 드러내고, 무릎 위에 큰 책을 펼친 채 사색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지적인 풍모를 강조했다. 작은 것을 크게, 감춰진 것을 드러나게 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도록 관람자를 이끈다. 거울과 캔버스의 뒷면을 이용해 그림이 보여주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겠다는 야심, 그 야심에 인간에 대한 화가의 따뜻한 시선이 녹아 있다. ‘시녀들’이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분석이 많이 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피카소는 이 작품의 구성과 인물을 재해석한 그림을 58점이나 그리면서 화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벨라스케스는 1599년 세비야에서 출생,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배웠다. 1623년, 마드리드로 가서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수십년간 복무하게 된다. 1628년 만난 루벤스의 영향으로 카라바조풍의 어두운 그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그후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빛의 중요성에 눈을 뜨면서 그림은 더욱 밝아진다. 후기로 갈수록 빠른 스케치로 순간적인 것을 포착하여 흐릿하고 거친 붓질이 선명히 드러나게 작업했다. 인상주의가 나오기 200년 전에 선보인 과감하고 자유분방한 그의 화풍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화가들, 특히 마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정연복 편집위원 www.facebook.com/yeonbok.jeong.75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시녀들 Las Meninas’(1656, 캔버스에 유채, 313X276cm, 프라도 박물관, 마드리드)
선명한 화질의 그림으로 직접 가기 
https://en.wikipedia.org/wiki/Las_Meninas#/media/File:Las_Meninas,_by_Diego_Vel%C3%A1zquez,_from_Prado_in_Google_Earth.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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