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론치노, ‘날 만지지 마라’ 
박물관에는 모든 것이 있다. 역사, 신화, 종교, 사랑, 죽음 등의 이야기들이 인간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펼치며 관람객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던진다. 예술가들의 뛰어난 발상과 기교 역시 찬탄을 불러일으키는데, 캔버스 안으로 깊이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입체감, 살갗이 만져질 듯한 사실감, 부드러운 빛과 색채가 주는 황홀감 등 다양하다. 때로는 추하고 기괴해 보이고 코믹해 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뛰어난 풍자와 비판 정신을 담았거나 기존의 규범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학을 탐색하는 시대의 예술일 경우,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고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비율도 맞지 않고 인물들의 자세도 어색하거나 불안정해서 유독 눈에 띄는 작품들도 있다. 16세기 피렌체의 메디치가(家) 전속화가이기도 했던 브론치노(Agnolo Bronzino, 1503-1572)가 그린 ‘날 만지지 마라’가 대표적인 예다.  

요한복음 20장 12절부터 17절까지에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마리아가 "그분이 어디 계신지 아느냐? "라고 묻자 예수가 "마리아야!" 하고 부르는 소리에 알아보고는 가까이 다가가려 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고 일렀다. 

이 주제는 11세기 초의 조각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때 이후 14세기까지, 가령 이탈리아 시에나(Sienna) 지방의 화가 두치오(Duccio)의 그림(1308-1311)에서 마리아는 두건을 쓰고 온 몸을 가린 채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있다. 거의 수직으로 서 있는 예수 역시 부동의 자세에 가깝고, 둘 사이는 범접할 수 없는 거리로 벌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 15세기의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는 두건을 벗어 던진, 눈부신 금발의 마리아를 선보였고, 16세기 초의 티치아노(1514)에 오면 종교화라기 보다는 우아한 세속화 느낌이 난다. 예수는 마리아의 손길을 피하느라 몸을 곡선으로 휘게 하면서도 더할 수 없이 부드럽고 인자하게 그녀를 바라본다. 그에게 다가가려는 그녀의 몸짓에는 간절함이 가득하고 풍성하게 그려진 붉은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 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무척 아름답다. 무엇보다 티치아노는 붉게 물든 하늘과 푸른 바다, 양들이 노니는 목가적인 배경 속에 두 인물을 그려 넣어 마치 한 편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50여년 뒤 대표적인 매너리즘(후기 르네상스 양식. 길게 늘어뜨린 인체, 복잡하고 불안정한 구성이 특징) 화가 브론치노는 티치아노보다 훨씬 더 과장된 몸짓과 묘한 구성을 택한다. 예수의 과도하게 비튼 상체, 발레리노처럼 우아한 팔과 손가락, 아래로 내려보는 새침한 표정은 발달된 근육과 잘 어우러지지 않아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뒤에 곱게 가꿔진 작은 정원과 들고 있는 삽은 마리아가 예수를 정원사로 여겼다는 것을 나타내고, 왼쪽 멀리 골고다 언덕에는 십자가 세 개가 세워져 있다. 한껏 뽐내는 듯한 예수에 비하면 마리아는 양다리와 양팔을 크게 벌리며 몸을 웅크리고 있어 작고 어줍잖아 보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올려다보며 그의 표정을 살핀다. 발치에는 그녀와 함께 늘 표현되는 향유병이 놓여 있고 보석장식이 달린 망토와 긴 머리카락은 뒤로 휘날린다. 그녀처럼 곱게 꾸민 두 여인도 부활한 예수를 보고 놀란 표정이다. 오른쪽 위에는 앞에 그려진 세 여인이 비어 있는 무덤을 보며 어찌된 영문인지 천사에게 묻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같은 화폭에 여러 시간을 같이 나타내던 중세기 그림의 잔재다.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는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 영적 존재다. 그 사실을 모르는 마리아는 여전히 지상의 존재로 생각하고 손을 잡으려 하지만 이제 그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길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전파하는 것뿐이다. 마리아는 예수가 부활한 아침 맨 먼저 그를 만나 부활을 증언하며 평생 회개와 고행 속에 살았던 성녀이다. 그런데 브론치노의 그림은 좀 생뚱맞아 보인다. 그 이유는 뭘까? 예수는 지상의 세계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려는 중인데, 그의 몸과 몸짓이 지나치게 부각된 탓이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손(Henri Bergson, 1859-1941)은 희극성을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작은 책 ‘웃음’에서 “정신이 중요한 상황에서 육체로 관심을 쏠리게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희극적이다”라고 말한다. 저렇게 뒤뚱거리는 자세로는 급하게 다가오는 마리아를 피하다가 넘어지거나 삐끗하지나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관람자가 내용이나 주제(기의記意)가 아니라 그림에서 보이는 것(기표記標)에 더 주목할 때 본말이 전도되면서 예상하지 못한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만 아는 것이 보는 것을 방해하는 일도 많다. 박물관은 심각하고 따분한 곳이 아니다. 주제나 예술사조에 얽매이지 말고 ‘눈으로 보는 체험’에 몸을 맡기고 작품을 보면서 의외의 즐거움을 만끽해 보자. 

/정연복 편집위원 www.facebook.com/yeonbok.jeong.75
브론치노(Agnolo Bronzino, 1503-1572), ‘정원사 그리스도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혹은 날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1560-1562, 목판에 유채, 289X194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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