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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복의 미술관노트] 빛과 색깔로 그리는 이상향

기사승인 2018.10.29  09: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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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치아노 ‘전원의 연주회’

풍성한 소매의 붉은 상의, 붉은 모자, 밝은 색 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루트를 연주한다. 옆의 남자는 어수선한 갈색 머리, 소박한 옷차림에 맨발이다. 앞에는 옷을 벗은 두 여인이 우물에 물을 따르거나 플루트를 분다. 그들 뒤로는 경사가 심한 들판이 펼쳐지고, 석양과 구름이 그림 전체에 부드러운 빛과 그림자를 드리운다. 오른쪽 멀리 목동이 양들을 지키고 있다. 베네치아의 귀족과 누드의 여인, 목동이 모두 한 장면에 그려졌으나 각자 자신의 일에 여념이 없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두 남자는 바로 앞의 두 여성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16세기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화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00-1576)의 ‘전원의 연주회’로, 시(詩)에 대한 우의(寓意)를 나타낸다. 우물에 따르는 물처럼, 루트나 플루트에서 들려오는 음악처럼 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여인들은 두 남자에게 시적인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뮤즈이다. 그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자들의 상상 속에만 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은 당대 베네치아에서는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티치아노는 풍경화를 배경으로만 여기지 않고 영혼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평온한 풍경 속에서 양을 치며 피리를 부는 목동은 베르길리우스가 ‘목가집’에서 노래했던 이상향, 즉 아르카디아의 신화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베네치아는 118개의 작은 섬들이 400여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는 물의 도시다. 눈을 뜨면 운하에 반짝이는 빛과 솜털같은 뭉게구름, 비바람을 머금은 먹구름, 핏빛의 노을이 어디서나 보이니 그야말로 일상이 감각적 행복으로 충만할 듯하다. 이런 자연 환경에서 베네치아 화가들이 색깔과 빛에 뛰어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기하학적인 정확성을 중시하는 피렌체 르네상스 화가들과는 달리 멀어질수록 색깔이 옅어지는 대기 원근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깊이감을 부드럽게 표현하였다. 다채로운 구름이 드리운 하늘은 후일 유럽 전역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칠 베네치아파의 특징이다. 티치아노는 ‘전원의 연주회’에서 친퀘첸토(Cinquecento, 500이라는 뜻으로 이탈리아 미술에서 1500년대)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잘 보여준다. 

‘전원의 연주회’는 독일 퀠른 출신으로 30세에 프랑스에 귀화한 야바흐(Everhard Jabach, 1618-1695)의 소장품이었다. 앤트워프에서 은행을 설립, 큰 자산을 모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사업을 하여 대부호가 되었고, 당대 제일가는 예술품 수집가로 알려졌다. 1661-1662년, 1671년 두 차례에 걸쳐 그가 소장한 르네상스와 17세기 작품들 중 일부를 루이 14세에게 팔았다. 이때 티치아노, 브론치노, 카라바조, 루벤스의 걸작들을 포함한 101점의 그림과 오천여 점의 데생들이 루브르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조르조네(Giogione, 1478?-1510)의 작품 혹은 제자 티치아노와의 공동작품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1509년 무렵 함께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티치아노의 단독 작품이라는 추정이 맨 처음 등장한 것은 300년 후인 1803년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 1772-1829)에 의해서이다. 티치아노가 젊은 시절 작업한 다른 그림들과 비교하며 ‘전원의 연주회’에 등장한 여인들 역시 육중하게 그려진 걸로 보아 그의 초기 양식 작품이라는 주장이었다. 미술사가들은 서 있는 여인의 조각같은 얼굴, 나무, 풍경 등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며 200년 가까이 논박을 이어오다 오늘날에는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확정되었다. 

마네는 루브르를 드나들며 이 작품의 구성에서 영감을 얻어 ‘풀밭 위의 식사’(1863, 오르세)를 그렸다. 두 작품 모두 옷을 입은 두 남성, 전신 혹은 반신 누드의 두 여성이 전원을 배경으로 있다. 마네가 전통에 내린 닻은 여기까지다. 티치아노가 비현실적인, 신화 속의 여인을 이상적으로 그린 데 반해, 마네는 적나라하게 ‘벌거벗은’ 인물을 보여준다. 티치아노의 여인은 사색에 잠겨 조심스럽게 옆으로 얼굴을 돌린 자세고, 마네의 모델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돌한 시선으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미술사에서 익숙한 구도의 누드이면서도 신화적인 인물이 아닌 19세기 당대의 여성을 그렸다는 점에서 마네는 같은 해에 그린 ‘올랭피아’ 직전에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발원하여 로마를 거쳐 베네치아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운다. 피렌체 르네상스는 데생을 통해 이상적인 비율과 가장 완벽한 구성을 찾고자 했다. 이와 달리 티치아노로 대표되는 베네치아 화가들은 빛과 색깔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바탕으로 만져질 것 같이 감각적인 그림을 추구했다. 그들은 회화가 자연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밑그림을 생략하거나 무시한 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직접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티치아노는 때로는 거칠게, 또는 부드럽게 색채가 마치 살아 숨쉬는 듯이 표현하여 관람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불완전한 비율과 과감한 구성도 서슴치 않았던 그는 당대 베네치아 화가들을 비롯, 후대의 루벤스, 와토, 들라크루아, 마네 뿐 아니라 새로운 미학을 선도하는 화가들의 영원한 스승이다.  

/정연복 편집위원 www.facebook.com/yeonbok.jeong.75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00-1576), ‘전원의 연주회 Le concert champêtre’(1508-1509, 105X137cm,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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