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로댕 ‘발자크 상’

파리에는 많은 박물관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로댕 박물관은 특히 아름답다. 18세기 초에 지어진 건축물도 우아하고, 로댕의 조각으로 수놓아진 초록의 정원은 사계절 언제나 매력적이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오른쪽 정원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높은 좌대에 앉아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조각의 의미를 되새기며 걸음을 옮기다 ‘발자크 상’을 마주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3미터 가까운 큰 키에 풍성한 옷을 입고 서 있는 모습에서 압도적인 존재감과 묘한 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짙은 눈썹과 콧수염, 두껍고 넓은 턱, 목이 없이 어깨에 바로 붙은 것 같은 큰 두상은 위대하거나 존경스러운 문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 (Honoré de Balzac, 1799-1850)는 19세의 젊은 나이에 “살아야 했고 12만 5천 프랑의 빚을 갚는 방법은 내 펜 밖에 없었다” 라고 고백한다. 돈을 벌기 위해 벌인 갖가지 사업이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하루 열두 시간씩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그는 뼛속 깊이 보수적이었지만 당대 사회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묘사한 뛰어난 작가였다. “최종 원고가 인쇄업자에게 넘어가면 발자크는 레스토랑으로 달려갔고, 먼저 굴 100개를 주문해서 화이트 와인 4병과 함께 먹어 치운 후에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앙카 멀스타인이 쓴 ‘발자크의 식탁’에 나온 증언이다. 어린 시절 기숙학교에서 굶주린 경험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흔히 상상하는 작가의 이미지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밤새 커피를 마시며 끝없이 글을 써서 시대를 증언했던 그를 후대의 어느 비평가는 “가장 위대한 리얼리즘 소설가”로 추앙한다. 그는 평생 부유한 귀부인과 결혼하길 꿈꾸다가 소원을 이룬 지 몇 달만에 눈을 감았다. 발자크만큼 이율배반적인 작가도 드물 것이다. 오귀스트 로댕은 바로 이런 작가의 모습을 우리 눈 앞에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어한 것 같다.

소설가라면 흔히 펜을 들고 있거나 깊이 생각에 빠진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로댕은 그런 평범한 모습으로는 발자크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삶에 대한 야망과 실패로 고통스러워 했던 한 인간이었기에, 당당함이나 권위보다는 고독과 환멸이 느껴지는 표정을 택했다. 오른발을 내밀고 뒤로 기울인 채 거리를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 큰 자루 같은 옷 안에 거대하게 표현된 몸에서는 모순 덩어리인 발자크의 존재와, 그가 소설에서 그린 1800년대 초, 중반 프랑스 사회의 온갖 인간군상들이 공존하며 숨쉬는 듯하다. 혁명과 왕정 복고기를 겪은 무능하고 비굴한 왕당파 귀족들,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 범죄와 부도덕, 유혹이 판치는 세상에서 서서히 타락해가는 젊은이들... 

문인 협회장이었던 에밀 졸라로부터 발자크 상의 조각 의뢰를 받은 것은 1891년이었다. 로댕은 생전의 작가를 그린 데생, 초상화, 판화, 사진뿐 아니라 작가의 고향 투르(Tours)에 가서 그와 외모가 비슷한 사람을 모델로 삼아 작업한다. 발자크의 재단사를 만나면서, 글을 쓸 때 입었던 실내복 차림의 조각을 구상하게 되고, 옷을 벗은 전신상과 두상 조각도 병행하는 등 여러 시도 끝에 1898년 ‘발자크 기념상’의 석고본을 살롱(국립미술협회에서 주관하여 1890년부터 해마다 개최되는 전시회로 지금도 매년 열린다)에 전시한다. 

살롱에서의 반응은 냉담했다. 문인협회는 주문을 철회한 뒤 다른 조각가에게 다시 의뢰한다. 로댕의 조각이 낳은 파문은 조각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 한 마디로 ‘미완성 non-finito’, 즉, ‘끝내지 않은 느낌’ 때문이다. 매끈하지 않고 표면이 거칠어, 아직 손질을 더 해야 할 것 같다. 인상주의 회화가 빛의 효과로 형태가 뭉개진 것처럼 보이듯이, ‘발자크 상’은 구체적이고 정교한 세부 묘사 없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에서 무엇인가가 꿈틀대며 소용돌이치는 듯하다. 위대한 소설가 발자크를 ‘제대로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아’ 추하고 기괴해 보이도록 나타냈다는 것을 당대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청동상은 로댕 사후 9년만인 1926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주조되었고, 문인협회는 1939년 원래 계획된 파리 시내의 대로변에 로댕의 ‘발자크 상’을 세운다. 파리의 로댕 박물관에 소장된 것은 1935년에 제작된 청동상이다.

발자크와 로댕은 묘하게 닮았다. 발자크가 단테의 ‘신곡’에 대응하는 ‘인간희극’을 썼듯이, 로댕은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에 맞서는 ‘지옥의 문’을 제작했다. ‘인간희극’은 동일한 인물들이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24편의 장편 소설과 무수한 중편 소설로 이루어졌다. ‘지옥의 문’ 역시 갖가지 이유로 고통을 겪는 인간들의 파노라마를 보여주었고, 작품에 등장한 ‘생각하는 사람’ ‘입맞춤’ ‘우골리노’ ‘세 그림자’ 등 많은 조각들이 따로 제작되었다. 발자크와 로댕의 인물들은 하나의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재등장함으로써 입체적이고 실존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의 작품 안에 가둬지지도, 그 안에서 삶이 완결되지도 않는다. 로댕이 ‘발자크 상’에 담고자 한 것은 이 모든 이들의 뜨거운 삶의 숨결이리라.
/정연복 편집위원 www.facebook.com/yeonbok.jeong.75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 ‘발자크 기념상 Monument à Balzac’
(1891-1898, 청동, 270X120.5X128cm, 로댕 박물관,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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