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다윗’

불문학을 공부하고 학위 논문을 준비할 때였다. 머리를 식힐 땐 늘 미술사 도판을 뒤적였다. 렘브란트, 베르메르, 들라크루아, 마네, 드가, 마티스의 그림을 보다 보면 친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눈 듯한 충만감이 가득 차오르곤 했다. 그날도 우연히 책을 펼쳤는데, 그때까지 보아왔던 어떤 그림과도 다른 독특한 작품을 보게 되었다. 단순한 구성, 짙은 어둠과 빛의 대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두 인물을 보자 마자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di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와의 첫만남이다. 이때 본 작품이 바로 ‘다윗’이었다. 몇 년 후 운명처럼 파리에서 미술사 공부를 하게 되었고 로마에 가서 이 그림을 직접 보았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구약의 사무엘 상 17장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현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전열을 벌이고 대치하던 중,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소리지르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욕했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참전중인 세 형을 만나러 전장에 들른 소년 목동 다윗이 용감히 나섰다. 돌멩이 한 개를 던져 이마에 명중시키자 골리앗이 맥없이 쓰러졌다. 다윗은 바로 달려가 골리앗의 칼집에서 뺀 칼로 그의 목을 베었다. 이 장면은 기원전 천 년경, 도저히 맞설 수 없는 강한 이교도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는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에 맞선 가톨릭 교회의 개혁 속에서 신교도(Protestant)를 처단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악을 응징하는 장면이 무수히 그려졌다. 이때 다윗은 가톨릭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사람으로, 골리앗은 물리쳐야 할 악한 신교도의 의미를 띠고 자주 다루어졌다. 카라바조는 세 점의 ‘다윗’을 남겼고, 그 중 마지막으로 그린 것이 로마의 보르게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골리앗의 이마에는 돌에 맞은 자국이 뚜렷하고 수염 아래로는 선연한 피가 뚝뚝 떨어진다. 미간에 잡힌 주름,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말려 올라간 혀, 형형한 눈빛으로 보건대 받아들이기 힘든 자신의 종말에 맞서고 있다. 반면 다윗은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거둔 한 인간을 조용히 응시한다. 눈빛은 오묘하고 깊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골리앗을 응징했으나 죽은 자에 대한 증오와 연민이 뒤섞여 있다. 흥미로운 것은 카라바조가 젊은 다윗과 나이든 골리앗의 얼굴을 자화상으로 그렸다는 사실이다. 화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 선고를 받은 뒤였다. 도피 생활을 하며 언제 잡혀서 죽을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고, 이로 인한 복잡한 심리가 이중의 자화상 속에 배어 있다. 정확하게 피라미드 구성을 이루는 그림에서 다윗의 작은 얼굴은 골리앗의 크고 뚜렷한 얼굴을 한 축으로, 차갑게 빛나는 칼선을 다른 한 축으로 어둠의 경계에 놓여 있다. 그 곳에는 선과 악의 구분도, 죽음과 생의 구분도, 자신과 타인의 구분도 없다. 자신에 대한 끝없는 응시만 있을 뿐이다.

카라바조가 이보다 먼저 그린 두 ‘다윗’에서는 골리앗에 대한 측은함이나 필멸(必滅)의 존재에 대한 상념은 보이지 않는다. 마드리드 소장품(1600, 프라도 박물관)에서는 속절없이 숨이 끊어진 무기력한 거인과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조차 모를 것 같은 미숙한 소년이 극단적으로 대립된다. 두번째 ‘다윗’(1600-1601 혹은 1607, 쿤스트히스토리쉬 박물관)에서 소년은 소풍이라도 다녀온 듯 칼을 등 뒤에 걸친 채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의기양양해 한다. 전형적인 승리의 도상(圖像)이다.

카라바조는 반종교개혁이 선호하는 주제를 다루었으나 주제를 훨씬 내면화하였다. 관람자는 일어난 사건보다는 사건 속에서 인물들이 겪는 정신적 움직임에 더 집중하게 된다. 티치아노가 목이 잘린 참혹한 골리앗 옆에서 하늘에 감사 기도를 드리는 ‘다윗’(1542-1544,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을, 루벤스가 일격을 가하기 직전의 분노의 ‘다윗’(1630, 노턴 사이먼 미술관)을 나타낸 것과는 사뭇 다르다. 카라바조의 주제는 애국심이나 가톨릭의 승리가 아니라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즉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에 더 가깝다. 마지막 ‘다윗’을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라바조는 드라마틱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엄숙주의를 벗어 던진 종교화, 과감하고 단순한 구도, ‘테네브리즘’(강한 명암대비로 극적인 표현을 낳는 기법)으로 17세기 전반 유럽 전역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후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20세기 들어 높게 재평가되고 있다.

/정연복 편집위원 www.facebook.com/yeonbok.jeong.75

카라바조(Michelangelo di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1606-1607 혹은 1609-1610, 캔버스에 유채, 125 x 101 cm, 보르게세 박물관,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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